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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글

카트라이더는 하나의 인생이다.


* 사진은 제 아이디가 아닙니다.



요즘 카트라이더 맵들이 되게 꾸불꾸불한 커브들이 많아서, 자주 부딪치곤 한다. 매일 카트라이더를 했던 옛날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어쩌다 게임을 못하게 되니-게임하다가 걸리면 스트라이크를 발부받는 세상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차마 멋진 세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에-나의 실력은 녹슬고 녹슬어... 모래 알갱이만큼 작은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게임을 하다가 자꾸만 화가 나는 것이 도대체 나는 게임을 왜이리 못하냐는 것이다. 물론 게임을 잘하는 것이 자랑거리일지 아니면 자조거리일지는 사회가 후자에 가깝게 판단을 해주겠지만 잘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물론 게임을 잘하게 된 계기가 공부로부터의 탈출 또는 도피...와 같은 심리 때문이겠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를 무참히 박살낸 이 시대에 이러한 게임은 이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아직까지도 공부만 하라고 들볶아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당신들이 공부 해보시던가.

 

시속 200km로 달리다가도 자주 부딪치어서 시속 100 50 마침내 0이 되었을 때는 이 삶을 포기하고 싶다. 현실에서 100이라 한다면 고속도로에서 막힘없이 달리는 한 대의 카니발을 나는 떠올리며 아 빠르다고 하겠지만 게임에서의 100은 참으로 의미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200으로 달릴 때 100으로 달림이란 자괴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남들보다 뒤쳐지고 뒤쳐져 10 9 8 7 ... 마지막 카운트가 끝나고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한 판이 끝났을 즈음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달려야하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누가 이렇게 우리를 강요했는가?

 

도박을 걸어본다. 3 2 1 START 시작된 게임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를 돌아 역주행을 시작한다. 역주행이라고, 빨리 뒤를 돌아 제대로 달리라고 경고하는 시스템의 메시지도 가뿐히 무시한다. 내 뒤로 달려가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난다. 빠르게 빠르게 부딪치지 않게 각종 미사일과 우주선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1등이 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나 역시 미사일을 만지작 거린다. 역주행하는 사람에게 미사일 맞아본 적 있나? 엿 먹어봐라!

 

뚜... 뚜... 뚜... 미사일 조준점이 드디어 빨갛게 변했다. 내 미사일망에 포착된 그 사람... 그 사람...

 

꼴등이었다.

 

아무 돈도 들이지 않은 카트로 낑낑대며 달려가고 있었다. HT ST 각종 현란한 부스터와 시스템이 구축된 1등 2등들이 선두를 독점하고 있을 때 그는 싸구려 루찌 카트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미 선두와는 한참 뒤쳐져있었고 그가 결승선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해보였다. 꼴등이, 사회의 낙오자가, 인생의 실패자가 되리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고 가혹했고 슬퍼했다. 역주행의 미사일과 꼴등... 도대체 우린 무슨 인연으로 이리도 잔인하게 만난 것일까.

 

꼴등은 서서히 앞으로 다가왔다. 부릉부릉부르릉부와왕... - 내 앞 저 멀리 있는 1등들의 부(富)의 부스터를 너는 보았니? 어떻더니? 역시 부르릉 힘이 넘쳤니? 그런데 나의 부스터는... 역주행하는 너의 부스터보다도 못한... 옛날엔 새 것이었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이미 낡아버린... 문명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 기술의 공백에 빠져있는... 나의 미래엔 답이 없어. 세상은 아무래도... 공평치 않은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1등 2등과 같은 질 높은 캐시 카트를 타고 있었고 그걸 타면서도 나는 역주행으로 그를 미사일로 조준... 하고 있었고

 

- 이제 갈 시간이야.

 

10 9 8 7 6 5 4 3 2 1

 

게임은 끝났다. 나도 그도 끝내 세 바퀴를 채우지 못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의 손에는 아직도 미사일이 쥐어져 있었고 아직도 꼴등을 조준하고 있었다. 게임이 끝났지만 열심히 1등을 해보라고 이벤트가 실시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할 터였다. 1등은 항상 정해져 있으니까.

 

미사일을 잡아본다. 그를 조준하던 빨간 점을 떼이고 하늘에 다시 붙여본다. 다시 파랗게 변한 점은 아무도 조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조준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에게도 분노하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누구도 죄가 없다. 잘못이 없다. 모두가 결백하다!

 

- 나에게 쏠 생각인가?

 

- 아니, 심판해야할 존재가 하나 있거든.

 

파란 점으로 하늘을 조준해본다. 저 하아얀 구름들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어둠은 우리를 잡아먹는다. 저편에서는 1등과 2등 3등에게 수많은 RP와 루찌와 이벤트 보너스와 PC방 보너스가 주저없이 주어지고 있다. 부럽지도 않아.

 

- 저들을 심판할 생각인가?

 

- 아니, 저들은 열심히 달려왔을 뿐이야, 1등을 위해. 내가 심판해야할 대상은

 

미사일을 쏘아 올린다. 조그마한 미사일이, 단지 다른 사람 한 사람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미사일은 하늘 끝까지 날아간다. 날아가 성층권을 뚫고 중간권 열권을 지나 저 우주로 나아가

 

 

의미없는 하나의 별이 된다.

 

- 당신은 거짓말을 잘 치는군.

 

- 역주행도 나에게 친 거짓말 중 하나야.

 

- 세상을 심판하려 든건가?

 

- 그렇게 본다면. 어쩌다 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 저 별은... 불태워야하는 우리의 밤을 지켜주지 못할걸세. 항상 밤에도 우리는 불을 밝혀 달려야하니까.

 

- 그렇군, 곧 곧 기말고사니까.

 

- 늦겠어. 어서 가도록 하지. READY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할거야.

 

- 으응, 그러지.

 

다시 부르릉 나아간다. 더 좋은 성능으로 강화된 나의 카트는 이미 그의 형체조차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앞으로 나아가자 달려가자 READY를 누르자 달려가고 미사일로 타인을 박살내고 그를 밟고 그를 발판 삼아 1등의 제단으로 나아가자...

 

나는 게임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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