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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글

내가 맨날 가는 정보과학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야!




도서실에서 자리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RFID칩이 내장된 전자카드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더라도, 갖은 편법을 동원하여 자리를 독점하려는 독종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독종 중 하나다.

 

도서실을 갈 때마다 항상 3개 이상의 카드를 들고 간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하고 내 것까지 하면 4개나 된다. 세 개씩 들고다니는 것은 1개를 덜 이용함으로써 양심의 부분적 회복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 날도 명당 자리를 독점하기 위해 거침없이 세 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시간은 이미 5시 28분. 자리 뽑기가 시작된지 몇십 초나 지난 시간. 잠시 졸았던 내 자신을 책망하며 다만 내 앞에 서있는 이 과천중 여학생들이 용인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곰 한마리와 달리 아주 양심적이고 도덕성을 발휘하길 빌었다.

다행이도 그 후배들은 때묻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의 것만 뽑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씨ㅂ, 됬다! 연신 육두문자를 감탄사로 내뱉으며 손쉽게 명당 자리를 차지했다. 우하하, 오늘도 일 없구만. 밥이나 먹으러 가야...

 

그 때였다. 뒤에서 날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적어도 난 그렇게 느껴졌다-한 성인 분께서 나를 붙잡더니,

 

"저기... 지금 자리 두 개 뽑으신..."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여성 분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니 그... 원래 한 사람에 한 자리 아닌가요."

 

"예, 뭐, 그렇죠. 그래도 데스크 분들이 귀찮으셔서 그런지 통 막질 않으시데요."

 

이 사람 뭐지, 하며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는데...아뿔싸, 그녀는 보수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있는 법은 무조건 지켜야한다는 보수주의자. 밥 먹긴 글렀구나, 하며 속사포처럼 쏟아질 그녀의 훈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랄 뿐.

 

"어... 그게... 원래 이런 거 나쁜 짓..."

 

네, 나쁜 짓 맞습니다. 잘못한거 아니까 좀 빨리 말하라고요! 마음의 소리가 발광했다

 

"...이긴 한데... 그 자리... 저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읭? 이건 뭔 소린가. 그 얼굴, 표정, 몸짓 하나하나가 날 책망할 듯 엄숙한 기운이 나돌더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어... 뭐... 그러죠, 뭐."

 

뻘겋게 상기된 내 얼굴과 약간 떨리는 내 입술에서 당치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죠라니! 정신이 있는거야?

 

나와는 달리 그녀는 정말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었나보다. 명당자리가 무슨 강남 땅덩어리라도 되는 양 부산을 떨었다.(혹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표현이 질 떨어져 죄송합니다. 비하시킬 의도는 전혀 없어요...)

 

"일 번 자리죠? 우와, 다행이다. 전 거기 아니면 공부가 안 되더라구요."

 

아, 그렇다면 이 사람이 평소에 내가 미처 뽑기도 전에 얄밉게 일 번 자리를 쓸어갔던, 그 사람? 분노하고 절규해야 마땅한데 그 여성 분 웃음을 보니 미소 말고는 지을 표정이 따로 없었다. 제길, 왜 이리 착해 빠진거야!

 

지나치게 고마워하시던 그 여성 분은 나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자리 하나에 한 끼? 모르는 사람하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워서 극구 사양을 했는데도 기어이 밥을 샀다. 허허,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하나. 사주는데 안 먹을 순 없고, 제길, 맘 편히 먹을 수가 없겠구만.(기분 나빠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 때 당황스러웠던 거에요. 뒤끝 있는거 아닙니다ㅜㅜ)

 

밥이 나왔다.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시방석일 수가 없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를... 빨리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 참, 통성명도 안했네요. 난 A대 다니는 누구누구라 해요. 그 쪽은? 아직 중학생인거 같던데."

 

이 얼굴을 보고 중딩이란 말이 나오다니, 대단한 포용력의 소유자 같았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어... 중학생은 아니구요... 무슨 학교 다니는 이재웅입니다."

 

아, 짧은 탄식이 들렸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이였는듯. 나이 먹어 미안합니다, 외치고 싶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내 주위 공기를 누를 뿐 아니라 내 몸까지 한없이 짓이기고 있었다. 무안해? 말을 하라고 말을, 이 등신아.

 

말 없이 밥을 다 먹어갈 무렵, 여성 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도 무안했나보다.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나이를 보고 반말 쓰기를 결심했다가 아직 그럴만큼 가깝지 않다는 것을 말하다 느낀 모양이었다. 둘 사이의 느릿느릿한 공기만큼 그녀는 말을 질질 끌고 있었다.

 

"네... 얼마든지... 근데 반말 쓰셔도 괜찮아요..."

 

그녀의 막중한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이렇게 대답했더니, 그녀는 미소로 답하며 내가 평소에 끊임없이 생각해오던 변명을 건들고 말았다.

 

"그... 자리... 두 세 개 씩 뽑던데... 이유가 있는.. 거니?"

 

겨우겨우 뱉어낸 말들이었다. 그녀는 반말을 써달라는 내 말을 무슨 의무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갑자기 미안해졌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대답을 준비했다. 아무도 감당해내지 못할, 궁극의 논리!

 

음 글쎄요 딱히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이것은 제 양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카드 여러 장으로 자리 여러군데를 뽑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잘못된 일이기에 제 양심을 시험할 도구가 되는 것이죠 비양심적인 일을 저지르며 양심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 때마다 있음을 확인하고 위안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걸 보니 양심이 아직까진 살아있는 모양이네요 하하

 

"아... 어... 딱히 뭐... 피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니, 뭐 딱히 책망하려는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도 니 덕에 좋은 자리 얻었으니 나야 고맙지만..."

 

아, 뭔가 비틀어지고 있구나. 내 삶의 기둥, DNA를 이루던 모순의 논리들.

 

지금 내 옆옆 자리에 그 여성 분이 앉아 계신다. 그 날 이후 그녀에게서 밥을 얻어먹은 일은 없고, 무의식적으로 자리독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방금 발견하고나서, 두 자리를 퇴실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 그녀가 앉아야만하는 그 자리를 그 때부터 지금까지 뽑지 않았음에 신기해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녀에게 당당히 인사한다.

 

안녕하세요?